빙벽(5)-2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나른했지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오기는 더욱 뜨겁게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화의 절정에서... 그것을 깨트리자. 그것이 진짜 승리다.
진정하시지요
현 소위의 우상 파괴적 행동에 통쾌함과 동류 의식을 느끼면서도 가끔은 이렇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곤 했다.
별실을 나서면서 근우는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최근우를 우습게 보지 마라.
지금쯤 미국 서부의 어느 해안에서 햇빛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모습을 떠올리며 지섭은 물어 보았다.
이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번 여행만은 내 맘대로 모든 걸 결정하면서 가고 싶어.
미우는 오지 않았다. 혼자 맥주를 열 병 가까이 비우고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지섭은 경양식집을 빠져 나왔다.
밀림에서의 맥주 한잔이 그럴 수 없이 아쉬웠다.
대대장은 잠시 반응을 살피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 악수는... 박 대위 자신의 처참한 패배를 시인하는 어떤 절차와도 같았다.
알 수는 없었지만 어쟀든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몰락할 것이다. 처참하게.
왜 이렇게 몰리고만 있는가.
휴가를 가게 되면 미우를 불러 내리라고 그리고 키스보다 더한 일을 저지르고 말리라고 지섭은 마음을 다져 먹었다,
저들이 견고하고 당당한 탑을 쌓을수록 깨부술 가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벌겋게 술기운이 오른 모두의 얼굴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짐승과 같이 보였다.
무대로 올라가 휴가를 반납할 때의 거북함과 미쳐 날뛰는 회식에서의 소외감은, 이질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철기는 날아올 술병이거나 술잔을 각오하며 몸을 굳혔다
네가 뭐야, 자시가! 네 주제를 알아! 주둥이만 살아 가지고...
자습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얌전한 머리통들... 철기는 맨 뒷자리의 빈 책상을 거칠게 걷어찼다.
방바닥을 손으로 내리치는 박 선생이었다. 철기는 더욱 턱을 치켜 올렸다.
입을 다물면서도 철기는 쏘아보는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다
굽힐 순 없어.
처절하게 깨어지자.
난 이긴다.
그랬다. 출발이 1년 늦어지는 것뿐이었다.
이제 시작할 수 있다.
철기는 다짐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두고 봐, 난 널 무너뜨리고 말 거야. 널... 바꿔 놓고 말 거야.
그렇게 지섭을 따라다니리라. 언젠가의 맹세처럼지섭을 바꿔 놓으리라.
그렇지만 졸업할 때까지 자본론을 완역하기로 했던 그 스터디 그풉도 이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현실에 눈을 감은 교수가 되든지, 아니면 교직을 팽개치고 나가 거리의 투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야 되는 세상이다....
두 번이나 꿇었다는 얘긴 들었다. 좀 참지 그랬냐?
일을 터뜨리고 난 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철기로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문을 나서는 철기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했다.
무서운 녀석...
넌... 넌... 당당하게, 살아라. 부끄럽지 않게...
그러려면... 그러려면... 혼자서, 외롭게...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숨을 거둔 것이었다.
그 얼굴에는... 세상의 끝을 보아 버린 자의 허무가 짙게 서려 있었다.
유세장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그리고 끝내는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처절하게도 부딪치고 깨어졌던 철기...
난 잘못하지 않았다.
다만 이겼을 뿐이었다.
이제는 사단 내에서는 알려질만큼 알려진 처지가 아닌가. '1대대 또라이'라고 부르는 작자들도 있다고 했다.
이 일을 두고 보안대장은 근우의 정치적 기술을 테스트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최사장께선 위기 관리 능력이 좀 부족하신 것 아닙니까?
80년 10월의 대한민국을 움직여 가는 힘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조정수, 그가 이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사람이던가. 어쨌든 이런 파란가지 일으켜 놓고서 겨우 부장 정도록 만족을 한다?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지만 지섭은 내색하지 않았다. 흥분하는 것도 패배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즘 너무 많이 변해 가는 것 같애?
이 정도가 아니야. 앞으론 더 많이 놀라게 될걸?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현 소위에 대해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 주인이야 여전히 최 사장이시고, 운영만 조정수 씨가 맡아서 하는 겁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 있어서 세 번 쯤 있다는 중요한 승부처의 하나임을. 그리고 그 승부에서 자신이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음을.
우습게 보지 마.
저편이 뻔뻔스러운 그만큼 이편에서도 뻔뻔스러워지자.
국장을 목표로 하다가 방향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장직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